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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멍
쉬멍 걸엄수다
구영기 /
생태보전시민모임 생명그물 대표
6월 25일, 제주행 밤배에 몸을
싣고
난 복 많은 놈이다. 먹을 게 없어 쫄쫄 굶다 할
수 없어 쌀 얻으러 갔다가 모욕을 당하고 돌아오던 어둔 골목길이 눈물에 어른대며 한없이 무너져 내리던 어린 시절도 있었지만, 돌이켜 살아온 걸 곰곰
짚어보면 행복했고, 그래 모든 게 다 고맙다는
생각이다. 오래 살다보니 중앙동 부두
길을 지날 때마다 먼발치로 바라만 보던 제주행 배를
내가 타게 됐다. 어제나 그저께쯤 죽었으면 못
누렸을 호사豪奢 아닌가.
해야 할 일은 늘 줄지어 밀려 있지만 재워주고 또
밥도 준다기에 에라 따라 나서기로 했다. 물론
오름을 보고 올레를 걷고 싶은 욕망도 있었지만 굳이
화석연료를 태우면서까지 가는 게 옳은가. 그냥 마음 비우기 위한
걸음이라면 부산의 윤산길만 해도 내겐 오감키에 언감생심 아니었던가. 제주 올레가 소문나 비행기
편이 거의 동난 지경이라는데, 곧 또 식겠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리면 다 망가진다. 동네도 망가지고 사람도
영혼도 망가진다.
저녁 일곱 시, 배가 천천히 움직이는 느낌이
몸으로 전해온다. 한동안 어지럽겠지만 이렇게
배에 올라타면 영혼이 자유라는 바람을 탄다. 막연히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욕망慾望이 꿈틀대고, 꾹꾹 잘 다져뒀던 역마살이
깨어난다. 제주도 근해에 파랑 특보가
내렸다는데 잘 됐다, 오랜만에 파도 맛도 좀
보자.
파도 맛은 무슨?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마신 술이 파도가 흔들어대는 탓에 곱으로 취해 눈을 뜨니 새벽 다섯 시, 가볍게 몸을 씻고 뱃전에
나서니 벌써 날이 밝았다. 한 가족이나 두 가족이
바다가 보이는 4인 침대(바다로 창이 나 있어도 밤에는 어둠이라는
커튼이 드리워져 아무 것도 안 보인다)를 쓰면
1인당 5만7천 원(성수기, 주말 및 공휴일엔 10% 할증), 2인실은
7만 원
치이니(비행기 삯과 차는 얼마 없지만 잠을 자고
다음날 일정을 온전히 챙길 수 있다), 비행기 보다는 이 배를 타는
게 여행하는 맛 뿐 아니라 여행의 묘미를 훨씬 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제주 순환도로를 일주할
계획으로 자전거를 가져가는 젊은이들이 많이 눈에 띤다. 부럽고
예쁘다. 다들 막상 젊을 때는 그
젊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고 소진해 버리지 않던가.
6월 26일,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여섯시, 제주항
도착. 에구, 비가
내린다. 하선하니 제주사람 냄새가
나는 기사가 소형버스를 끌고 반겨준다. 하지만 비가 내려서
구질구질, 올레고 오름길이고 빗속
블루스blues겠다. 이런
청승. 여행사에서 섬에 들 때 비
오고 개고는 복불복福不福이라 했다는데, 일견一見 무책임한 듯도 하지만 또 그 말이 옳다.
버스에서 내리니 외돌개, 제주올레
7코스
출발지다. 외돌개서 시작하여
법환포구, 풍림리조트를 거쳐
월평포구까지 잇는 해안 올레다. 외돌개—돔베낭길—서귀포여고—호근동—속골—수봉로—법환포구—두머니물—일강정 바당올레(서건도)—풍림리조트—강정마을—강정포구—알강정—월평포구까지 총15.1km 길이다.
앞바다에 바위 하나가 불끈 솟아
있는데, 외롭게 서 있다 해서
외돌개란 이름이 붙었다. 거친 바닷바람에 맞서
굳건하게 살아 온 하르방이 바다를 바라보며 반신욕을
하는 듯한 모습이다. 머리에 풀을 인 모습이 더
그래 뵌다.
추적추적 비는 내리고 돔베낭길은 안개 속으로
이어진다. 제주올레 코스 가운데
바당 길로 이어져 으뜸으로 치는 소문난
길이다. 갈매빛 몸매를 담은 서귀포
바다를 바라보며 길을 걷다보면 절로 평화롭고 행복에 겨워드는 몸을 주체하기 어렵다. 온갖 새들이 끊임없이 소리를
지른다. 여태껏 이렇게 많은 새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손 타지 않은 자연 속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장자가
말했다. 자연은 최상의 궁극적인
것이라고. 그 최상의 궁극적인
자연自然을 그는 ‘도道’라
일렀다.
돔베낭 덱deck 길을 걸으며 내내 미안했다. 아마 그냥 흙길이면 패이고
걷기 어려워 나무로 덱을 달았을 것이다. 이곳 자연을 보호하고 나름
친환경 구조물로 만든다고 나무를 썼겠지만, 이렇게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어낸 보르네오, 수마트라 등지의 밀림
생태계는 분명 망가졌을 것이고 그곳 오랑우탄도 집을 잃고 가족과 헤어졌을 것이다. 모든 것은 다 연결되어
있다.
알지 못 하는 근원으로부터 밀려 온 파도가 바다
끝에서 부서진다.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피가 끓는다. 깊은 절망에
포로捕虜되어 삶이 아득할 때, 바다로
가라. 갖은 상처의 근원조차
문드러질 때까지 부서지는 파도에 네 야윈, 상처받은 영혼을 씻고 다시
일어서라. 지자요수智者樂水라 했다.
날 선 여들이 바다로 길게 뻗어 있다. 이런 곳에서도
?녀潛女들은 물질을 했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온 몸이
오그라들고 금방이라도 베인 발바닥에서 피가 흐를 것만 같다. 어떤 방식으로 살건 치열한
삶은 숭고하다. 여느 바다에서 볼 수 없던
염생식물들이 군데군데 바닷가 바위에 뿌리를 내려 자라고 있다. 그들 또한 이 혹독한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절절하게 몸부림치고 있는가. 나는 언제 그들만큼 절실하게
살고자 한 적이 있었던가.
서건도는 1709년에 제작한 탐라고지도에
‘부도腐島’라고 표기되어있는
섬이다. 말 그대로
‘썩은 섬’으로 섬의 토질이 썩은 흙이라
해서 그렇게 부른다는데, 지금의 서건도라는 이름은
으레 그렇듯 ‘썩은 섬’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굴절된 것이다. 하루 두
번, 간조 때마다 뭍에서 섬으로
가는 바닷길이 열린다.
풍림리조트 옆으로 흐르는 하천이
강정천이다. 사계절 내내 맑은 물이 흘러
은어가 산다는데 마침 내린 비로 거대한 흙탕물이 잔뜩 성질부리며 무섭게 흐른다. 불은 강물 탓에 출렁다리로
건너가지 못해 아쉽다.
예로부터 물과 땅이 좋아 쌀을 비롯한 곡식들이
제주에서 으뜸이라 하여 일강정이라 불렀단다. 일강정 바당올레는 험한 바위
사이로 고만고만한 제주 돌들이 검은 융단처럼 깔린 아름다운 길이다. 조물주造物主께서 베푸신 천연 갤러리다. 길 옆 바위 하나하나 자연이
만든 돌조각 작품으로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세상도 삶도 모두가
신비神?다.
올레는 본디 고샅을 일컫는 제주
말이다. 올레에 길이라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에 올레길이라 하면 역전앞이나 처가집처럼 군더더기 말이 된다. 그러나 제주도 해안을 따라
최근에 인위적으로 이은 길을 가리키는 새로운 대명사로서 ‘올레Olleh’이기에 굳이 올레길이라 쓴다고
우긴다면 할 말은 없다.
비슷한 말로 ‘오래’가
있는데, 대문大門의 옛말이기도 하고 마을(함경), 가문 또는
이웃(함남)을 가리키는
지역말이다. ‘한동네의 몇 집이
한골목이나 한 이웃으로 되어 사는 구역 안’, 또 다른 뜻으로
‘거리에서 대문으로 통하는 좁은
길’을
말한다. 그러니까 이 오래가 제주에서
올레로 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제주 올레는 제주 사람들의 삶과 문화가
살아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바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길을 완만한 곡선으로 틀고, 담도 그냥 주변에 널려 있는
돌덩이를 척척 쌓아올려 숭숭한 돌 틈으로 바람의 기를 빼는,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체득한
철학이 오롯이 담겨있는 문화다. 마치 갓 낚아 올린
물고기처럼 팔딱거리는 싱싱한 삶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걷는 제주 올레는 원주민의 삶이
배제된, 그저 제주 해변의 풍광 따라
이은 길인 것 같아 뭔가 아심찮다. 제주 사람들의 삶을 간판을
통해 간접적으로 짐작했을 뿐, 제주의 풍광만 보았을
뿐이다. 우리는 좀 너무 뜨겁다는
생각이다. 다들 양은 냄비로 깨 볶듯
하는 것은 아닐까. 어디 좋다면
떼로, 광란의 관광버스로 몰려가 별
느낌도 없이 그곳을 망가뜨리고는 또 쉬 잊어버린다.
제주추사관은 제주지역 문화예술인과 제주사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건립된 추사유물전시관이다.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이던
‘추사적거지’가 ‘추사유배지’로 이름을 바꿔 국가사적으로
승격되면서, 추사가 제주 유배시절에 그린
세한도歲寒圖를 모티브로 건립하였다29호 특집. [제주도 탐방기 1] 놀멍 쉬멍 걸엄수다